칼럼

누가 내 형제인가

행복한교회 2022.03.05 17:16 조회 수 : 107

소설가 황순원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독 소년과 소녀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아 이거나 혹은 편부모 아래에서 자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평가하기를 ‘작가로서 현실에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자 훼손된 아동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부정적인 현실을 파국으로 드러내기위한 장치’로서 아동의 이미지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결핍으로 자란 아이들의 정신적 외상증후'란 것입니다. 

 

흔히 ‘고아’는 부모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권익보호를 위해 ‘요보호 아동’이라고 부릅니다. 저소득 자녀와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동을 함께 지칭하고 있습니다. 어째튼 고아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렸을때부터 집단생활을 하게 되어 마음속에 큰 상처를 갖는다고 합니다. 결국 성인이 되어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부족하고 관계의 연속성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부모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을때 겪는 심리적 결핍과 상처가 남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증후를 겪는 것입니다. 

게다가 현대인은 ‘심리적 고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무기력한 부모, 가정폭력, 형제사이의 관계, 배우자의 부정 및 학대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가족이 있음에도 가족이 없는 것 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회,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사회가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봉사활동을 하지만, 다른 성도와의 깊은 관계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그가 자란 곳에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쁜 상태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친척들이 몰려와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막3:20-21) 그래서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향하여 ‘(과연) 누가 내 형제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즉 밖에서 나를 부르는 그들이 진정한 내 형제요 가족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가족의 선입관이 예수님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또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 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친밀함과 안전함에 가족의 기준을 두고 있는 우리에게, 심리적 고아 상태에 있는 현대인에게 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