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게 갈라디아 지역과 갈라디아 교회는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전도를 하다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쫓겨나기도 했고(행13:50) 심지어 그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 까지 따라와 무리를 충동질하여 결국 바울은 돌에 맞아 버려지기도 했습니다.(행14:19) 게다가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심하고 그 충고를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에 도전하기 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허용 기준’이 있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그 기준을 넘어 잘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킨다면 더이상 관계는 지속되지 못하며 심지어 파탄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번을 용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으시고 일흔번에 일곱번까지도 용서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참고로 당시 유대인들은 세번까지 용서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과 교회를 보며 ‘내가 과연 이 사람들을 몇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라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일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예수님을 위해 참고 때로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살았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허용기준’은 이미 넘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꺼내듭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 지금까지 온 그 과정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흔적’이 새겨진 자신을 설명하며 ‘우리는 과연 노예인가? 자유인인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고 있으면서 자유인인 줄 착각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상대방을 향한 미움과 증오를 마음에 담고 비교하며 불평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노예의 낙인을 찍어 자유를 박탈하며 평생 착취의 대상으로 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낙인을 찍어 보호하며 증표로 삼아 자유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매여있으며 또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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