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제단 알츠하이며 치료연구센터에서 흥미로운 분석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보다 잘 울지 안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사실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인 이상 남여의 차이가 있을리 없겠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는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울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는 비극적인 상황이 많습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거나, 자신이 사는 터전을 떠나거나 하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더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묵상해 본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에서 쫓겨나거나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하는 기막힌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깊은 슬픔에 빠져 좌절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싶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경험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경험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 즉 애통의 감정을 갖는 것은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닙니다. 피할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애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더구나 무엇을 위해 애통해야하느냐는 의문마져 듭니다. 마치 애통을 적극적으로 해야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왜 일까요?
우리는 요즘 감성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것 보단 감성적인 것이 훨씬 설득력을 갖는 시대에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눈물은 메말라가고 우울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정으로 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는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애통의 은혜’는 그 말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역설입니다. 하지만 애통할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갖는 특권이고 능력이 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감정의 해소를 위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진정으로 울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갖는 힘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없이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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