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역했던 곳에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이 곳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있는 곳이라 사람들이 잘 정착을 하지 못합니다. 다들 이곳으로 이사 올 때는 몇 년 정도 있다가가 서울로 이사 갈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이 자주 바뀌죠.’
하지만 서울에 사는 분들도 더 나은 강남지역을 선호합니다. 더구나 강남지역에도 소위 강남의 중심지역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국보다는 외국을 선호합니다. 유학중에 들었던 말입니다. ‘요즘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지역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예전 같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더 좋은 지역으로 가고 있어요. 대신 그 자리를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이 채우고 있어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난을 쫓는 삶은 필연적으로 ‘갈증’이 따라오게 됩니다. 물론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적인 가난 즉 ‘갈증’에 매이는 순간 우리는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잊고 눈이 멀어버리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난’에 대해 ‘절대적인 가난’ 곧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의 가난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가난한 상태를 ‘마음(심령)’에 비유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1)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욕과 갈증에 빠진 사람들 곧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절대적인 가난’에 있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끼고 갈증이 있는 상태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 갈증은 우리 눈을 멀게 만듭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난 즉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오직 한길만 바라보게 만드는 가난은 우리에게 풍성함과 천국을 가져다 준다는 뜻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우리는 가난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정작 내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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