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행복한교회 2022.05.14 20:07 조회 수 : 88

요즘들어 교회학교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교회학교 교사를 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부담감도 있고 더 많은 시간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는 말씀이 떠 올라서인지 ‘거룩한 부담’(?)감에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봉사를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교사를 할바에는 성가대를 하는 것이 낫다’는 말도 합니다. 

이렇듯 영혼에 대한 부담감과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사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과는 별개로 ‘교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목회 초창기 때부터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양을 잘 가르치는 것’과 ‘양을 깊이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의 균형 입니다. 물론 사랑하며 잘 가르치면 될 일이지만 어느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는 저에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교사의 목적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부족한 가르침’이 과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사랑이 강조되면 학생들은 방종하게 됩니다. 반대로 가르침이 강조되면 학생들은 금방 경직되고 관계를 끊게 됩니다. 

 

결국 최근에 들어서야 이 질문을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가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오신 것인가 사랑하려고 오신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제자들은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싸움으로 서로를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이 진정한 교사인가, 아볼로가 진정한 교사인가’로 다투는 그들에게 글을 쓰며 권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답답함을 마음에 담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갖고 있던 마음을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다.

결국은 이에대해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

 

본을 보이는 사랑, 본을 보이는 가르침 그것이 영향력이요 능력입니다.